불기 2559년 02월 - 입춘, 출가, 열반 - 행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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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산법화사 댓글 0건 조회 6,903회 작성일 19-08-26 15:13본문
나무묘법연화경
을미년乙未年 입춘을 맞이합니다.
올해는 간지干支로 양을 의미하는 을미년입니다. 천간天干이 십이지十二支의 두 번째 을乙이고 지지地支로는 여덟 번째인 미未입니다. 을미년이란 육십갑자에서 유래한 해의 구분으로 음력으로는 1월 1일(양력으로는 2월 19일)부터 시작합니다. 십이지의 여덟 번째 동물인 양은 방향으로는 남남서를 지키는 방위신이며, 시각으로는 오후 1시에서 3시이고, 달[月]로는 6월에 해당하는 시간신입니다.
양은 성격이 온화하고 착하며 참을성이 있어 무리를 지어 생활하면서 서로 잘 화합하고, 인간을 잘 따르는 순종의 미덕을 갖춘 동물로 여깁니다. 양의 습성은 초식동물로 넓은 들판에서 풍부한 풀을 뜯는 온순한 성격 외에도 험준한 산속에서도 무엇이든 잘 먹는 뛰어난 근면성과 적응성을 가지고 있으며, 위험이 닥치면 뿔을 들어 위협하여 방어하지만 더 이상 남을 해치지는 않는 자주적 자존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양은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제사용으로도 쓰이고 서양에서도 신에 대한 제사로 바쳐져서 속죄양(贖罪羊 Scapegoat)이란 말도 가지고 있는 평화와 희생의 상징으로 여겨왔습니다.
우리 법화경에서는 삼주설법 비설주의 화택삼거 비유에서 양의 수레로 나옵니다. 여기서 양의 수레는 방편의 삼승인 성문승을 가리킵니다. 인간과 떨어져서 주로 산속에 홀로 살아가는 연각승의 사슴에 비해서, 양은 비교적 사람을 잘 따르고 함께 생활하므로, 중생의 생로병사의 삶속에 같이 살면서 사제四諦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성문승을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안락행품에서는 “약축저양계구若畜猪羊鷄狗”라 하여 속세에서 많이 기르는 가축으로 돼지 닭 개와 함께 양을 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양의 해를 맞아 우리 법화행자들은 양의 장점을 취하여 항상 희망을 가지고 부지런히 일하고 수행하여 신묘한 양의 위의와 풍요를 가져오는 양의 위신력을 닮도록 열심히 노력하는 한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농경사회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절기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소한 대한의 추운 겨울을 보내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맞는 입춘은 24절기 가운데 첫 번째 절기 입니다. 입춘은 태양의 황경이 315도인 때로서 양력으로 2월 4일 무렵입니다. 입춘은 새해를 맞이하는 절기로 봄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여러 가지 민속행사 중 대표적인 것은 좋은 뜻의 글귀를 써서 대문이나 기둥 또는 들보 등에 붙이는 일입니다.
이것을 입춘첩立春帖이라 하며, 또는 입춘축立春祝이라고도 합니다. 궁중에서는 설날에 내전內殿 기둥과 난간에다 문신文臣들이 지은 연상시延祥詩 가운데 좋은 것을 뽑아 써 붙였는데 이를 춘첩자春帖子라 불렀습니다.
절기상으로 입춘은 동지冬至 이후 음陰의 기운을 지니던 대지가 양陽의 기운을 갖기 시작하며 모든 사물이 왕성히 생동하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입춘 전날이 절분節分인데 이것은 철(시절時節, 계절季節)의 마지막이란 뜻입니다. 이날 밤을 ‘해넘이’라 부르고, 콩을 방이나 문에 뿌려 악귀를 쫓고 새해를 맞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절은 아직 겨울인지라, 마음으로는 봄이라지만 추위가 강하여 ‘입춘추위’라는 말이 있으나, 가시지 않은 찬 기운이 봄에 따사로움으로 변하기를 기대하는 심정에서 연유된 말이며 풍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입춘을 맞으면서 입춘축立春祝이 의미하는 좋은 일들이 가내家內에 만당滿堂하기를 기원祈願하는 뜻에서 몇 가지 예를 소개합니다.
“입춘대길건양다경立春大吉建陽多慶”이란 입춘에는 크게 좋은 일이 있고, 새해가 시작함에 경사스런 일이 많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수여산부여해壽如山富如海”란 산처럼 장수하고 바다처럼 부유해지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소지황금출개문만복래掃地黃金出開門萬福來”란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온갖 복이 들어오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부모천년수자손만세영父母千年壽子孫萬歲榮”이란 부모님은 오래 사시고, 자손은 길이 영화를 누리기 바란다는 뜻입니다.
“용수오복호축삼재龍受五福虎逐三災”란 용은 오복을 들여오고 호랑이는 재앙을 쫓아낸다는 뜻입니다.
“국태민안가급인족國泰民安家給人足”이란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하여 집집마다 풍족하고 사람마다 넉넉하다는 뜻입니다.
“우순풍조시화풍년雨順風調時和豊年”이란 절기가 순조로우니 화평하고 풍성한 세월이 되기 바란다는 뜻입니다.
“천하태평사방무일사天下泰平四方無一事”란 온 세상이 태평한 봄이요, 사방 어느 곳에도 탈이 없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입춘을 맞이하여 우리 영산 법화행자들께도 매일매일 대길大吉하고, 만사여의萬事如意하시길 바랍니다.
2월 8일은 부처님께서 출가出家하신 날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 카필라국의 정반왕 태자로 태어나 화려한 왕궁의 생활을 버리고 구도求道길에 나선 것이 바로 출가일인 것입니다. 후일 성도成道하셔서 부처님이 되시고 법륜法輪을 굴리셔서 일찍이 없었던 진리를 밝혀 불교가 있게 하셨으니, 만약 출가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불문佛門에 사대명절四大名節 출가절出家節이 있게 된 동기動機입니다. 불교에서는 출가절을 시작으로 탄신일 성도재일 열반재일을 사대명절로 삼고 있습니다. 그는 왕위를 계승할 태자이셨고 그 총명한 자질로 인해 온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셨을 뿐 아니라, 후에는 야수다라라는 아름다운 부인과 사랑하는 아들 라후라가 있었으며, 궁중 생활은 즐겁고 유복有福하여 복이라는 복은 모두 갖추고 계셨지만 싣달다悉達多 태자는 괴로워 하셨습니다.
'중아함경'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남이 늙고 병들어서 괴로움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다. 남이 죽는 것을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나는 남이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을 보고 그것을 내일로 여겨 괴로워하고 싫어하며, 부끄러워하고 나의 젊음에 대한 교만, 건강에 대한 교만, 수명에 대한 교만을 버렸다.” 곧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에 대해 싣달다 태자는 스스로 눈을 뜨심으로 세속의 부귀영화富貴榮華는 물거품 같은 것임을 아셨으니, 출가의 선택은 참으로 현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현명한 행동 그 이상의 것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더구나 태자의 신분으로서 왕궁의 생활을 포기하는 데에는 크나큰 결단이 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두를 버리고 출가하셨던 그 용기는 곧바로 마魔를 항복 받고 정등정각正等正覺을 이루신 큰 힘이 된 것입니다. 후세의 사람들이 싣달다 태자의 출가를 일러 “위대한 포기抛棄”라고 찬탄하고 있습니다.
출가는 이와 같이 속세의 삶을 떠나 불도에 나아가는 첫 관문이므로, 오늘날 불가에서 출가는 세속의 범부들이 삼보에 귀의하여 승려가 입문으로 출가일을 승려의 날이라고도 합니다. 출가에는 신출가身出家와 심출가心出家의 2가지가 있습니다. 소승교의 비구 비구니, 대승교의 보살승처럼 신출가는 실제적인 몸으로 출가함을 말합니다. 이에 비해서 참된 출가는 마음의 출가 곧 모든 형상과 이름의 고정인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심출가입니다. '발심수행장'에서는 “심중에 애욕 떠난 것을 사문이라고 하고, 세속에 연연하지 않는 것을 출가라고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법화경 본문本門에서는 석가모니불이 구원실성 본불本佛이심이 밝혀진 바, 부처님은 영원한 과거에 성불하신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날의 위대한 출가의 참된 의의가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원한 부처님이 법신法身이나 보신報身을 수적垂迹하여 역사적 불타佛陀인 응신應身으로 몸을 나투신 응화에 의依해서만 중생을 교화하실 수 있는 까닭이며, 영원한 본불本佛일지라도 출가하사 구도求道하신 일은 중생에 대한 자비의 실천을 보이신 것입니다. 싣달다 태자의 현명한 판단과 결연한 의지를 본받아 흐트러지기 쉬운 우리들의 신심을 가다듬어야 되겠습니다.
2월 15일은 부처님께서 2559년 전에 열반涅槃(니르와나Nirvana:멸滅, 적멸寂滅, 무위無爲, 공적空寂하여 안온하므로 적寂 생사고해를 멸하므로 멸滅, 멸도, 생사의 인과를 멸하고 생사의 고해를 건너는 것. 일체의 번뇌와 고통을 영원히 끊어 버린 경지. 원적圓寂, 무위, 무작, 무생, 해탈이라 번역)하신 열반절입니다. 물론 불문佛門의 사대명절의 하나로 부처님께서 몸소 적멸(죽음)에 대해 모범을 보이신 날입니다.
“이때 나와 여러 중승衆僧이 함께 영축산에 나와, 내가 중생에게 말하되, 항상 여기에 있어 멸하지 아니하건만 방편력을 쓰는 고로 멸滅과 불멸不滅이 있음을 나타내노라.”(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20)
시아급중승 구출영축산 아시어중생 상재차불멸 이방편력고 현유멸불멸
時我及衆僧 俱出靈鷲山 我時語衆生 常在此不滅 以方便力故 現有滅不滅
부처님께서는 무시무종無始無終 영원히 항상 이 사바세계에 머물러 계십니다. 그러한 부처님께서 왜 입멸入滅 돌아가시는 것일까. 이것이 커다란 의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는 것은 죽는다고 하지 않고 열반涅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열반과 범부凡夫의 죽음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죽는[入滅]형상은 모두 같지만 그 내용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간략히 말하면 열반은 생사生死를 내 뜻대로 자유롭게 하는 것이요, 죽음은 그 반대로 생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는 생사를 여의고 자기 마음대로 생사를 맞이하는 것이요, 하나는 생사를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따라 이 세상에 출생하시고 돌아가실 때에는 당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돌아가시는 것이니 이것이 곧 열반인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우리 중생들은 이 세상에 출생한 것은 출생하고 싶어서 출생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세에 지은 업의 분한分限에 의해서 출생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인간의 모습으로 출생하신 이상 무상한 현상의 육신은 인연에 의해서 변하여 멸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현상은 역사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보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신앙적으로 볼 때 이런 일반적인 설명만으로는 흡족 할 수가 없으니, 진실로 부처님의 열반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방법의 힘을 쓰기 때문)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왜 이러한 방편을 왜 쓰셨을까. 그것은 어리석은 중생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여래가 항상 있어 멸하지 않음을 보게 되면 곧 교만한 생각을 일으키어 싫어지며 게으름을 품어서 만나기 어려운 생각과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리라.”(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10)
약견여래 상재불멸 변기교자 이회염태 불능생어난조지상공경지심
若見如來 常在不滅 便起憍恣 而懷厭怠 不能生於難遭之想恭敬之心
“항상 나를 보는 까닭으로 교만하고 방자한 마음을 내며 방일하고 오욕에 착해서 악도 중에 떨어지기 때문이니라.”(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24)
이상견아고 이생교자심 방일착오욕 타어악도중
以常見我故 而生憍恣心 放逸著五欲 墮於惡道中
우리들은 만약 부처님께서 항상 살아계셔서 가까이 모시고 끊임없이 교훈을 받고 있다면, 으레 그러려니 하고 크게 어렵고 고맙게 생각지 않을 뿐 아니라, 교만한 마음 방자한 마음 게으른 마음이 생겨서 존경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만나기 어려운 일을 만났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 결과 생사해탈의 훌륭한 법문을 듣고도 실행에 옮기지 않아서 마침내 악도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항상 이 세상에 계시는 고마운 일이 중생에게는 도리어 해가 될 것이므로, 그들에게 큰 놀라움을 주시어 각성케 하여 부지런히 정진하게 하시고자 입멸에 드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중생들은 몹시 놀라고 평소에 그러려니 하던 어리석은 생각을 뉘우치고 참회하고 반성하여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에서는 부모가 계실 때에는 부모가 보살펴 주심에 소홀히 예사로 생각하고 허물없이 되어서 이르는 말도 잘 듣지 않던 자식들이 뜻밖에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면 그제야 슬퍼하고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래수량품에는 독약을 먹고 본심을 잃은 아들들이 뜻밖에 먼 외국에 나가있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만약 아버지가 계시면 우리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생각하시어 능히 구해서 지켜주시련만 지금은 우리를 버리시고 먼 다른 나라에 가셔서 세상을 떠나셨도다.”(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16)
약부재자 자민아등 능견구호 금자사아 원상타국 자유고로 무부시호
若父在者 慈愍我等 能見救護 今者捨我 遠喪他國 自惟孤露 無復恃怙
라고 슬퍼하여 마침내 본심을 되찾았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중생은 부처님의 입멸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그 만나기 어려움을 알고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진리를 알고자하는 마음이 생겨서 비로소 선근을 닦게 되는 것이므로, 부처님은 불멸이시지마는 방편으로 열반의 상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항상 이 사바세계에 계시지마는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하여 입멸을 보여 주시는 것을 현멸現滅의 대자大慈라고 합니다. 중생을 위해서 나타나시고 사라지시고 하는 큰 자비야말로 부처님의 무한한 자비입니다. 이러한 대사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진정한 뜻은 끝내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영산법화사 사부대중 여러분!
입춘절과 출가일 열반일이 들어있는 2월을 맞아, 일터에서는 부지런히 일하고 도량에서는 열심히 정진하여 법화경의 진실한 뜻을 깨우쳐서 무량공덕과 구원실성 석가모니불의 가피가 항상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을미년乙未年 입춘을 맞이합니다.
올해는 간지干支로 양을 의미하는 을미년입니다. 천간天干이 십이지十二支의 두 번째 을乙이고 지지地支로는 여덟 번째인 미未입니다. 을미년이란 육십갑자에서 유래한 해의 구분으로 음력으로는 1월 1일(양력으로는 2월 19일)부터 시작합니다. 십이지의 여덟 번째 동물인 양은 방향으로는 남남서를 지키는 방위신이며, 시각으로는 오후 1시에서 3시이고, 달[月]로는 6월에 해당하는 시간신입니다.
양은 성격이 온화하고 착하며 참을성이 있어 무리를 지어 생활하면서 서로 잘 화합하고, 인간을 잘 따르는 순종의 미덕을 갖춘 동물로 여깁니다. 양의 습성은 초식동물로 넓은 들판에서 풍부한 풀을 뜯는 온순한 성격 외에도 험준한 산속에서도 무엇이든 잘 먹는 뛰어난 근면성과 적응성을 가지고 있으며, 위험이 닥치면 뿔을 들어 위협하여 방어하지만 더 이상 남을 해치지는 않는 자주적 자존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양은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제사용으로도 쓰이고 서양에서도 신에 대한 제사로 바쳐져서 속죄양(贖罪羊 Scapegoat)이란 말도 가지고 있는 평화와 희생의 상징으로 여겨왔습니다.
우리 법화경에서는 삼주설법 비설주의 화택삼거 비유에서 양의 수레로 나옵니다. 여기서 양의 수레는 방편의 삼승인 성문승을 가리킵니다. 인간과 떨어져서 주로 산속에 홀로 살아가는 연각승의 사슴에 비해서, 양은 비교적 사람을 잘 따르고 함께 생활하므로, 중생의 생로병사의 삶속에 같이 살면서 사제四諦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성문승을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안락행품에서는 “약축저양계구若畜猪羊鷄狗”라 하여 속세에서 많이 기르는 가축으로 돼지 닭 개와 함께 양을 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양의 해를 맞아 우리 법화행자들은 양의 장점을 취하여 항상 희망을 가지고 부지런히 일하고 수행하여 신묘한 양의 위의와 풍요를 가져오는 양의 위신력을 닮도록 열심히 노력하는 한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농경사회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절기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소한 대한의 추운 겨울을 보내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맞는 입춘은 24절기 가운데 첫 번째 절기 입니다. 입춘은 태양의 황경이 315도인 때로서 양력으로 2월 4일 무렵입니다. 입춘은 새해를 맞이하는 절기로 봄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여러 가지 민속행사 중 대표적인 것은 좋은 뜻의 글귀를 써서 대문이나 기둥 또는 들보 등에 붙이는 일입니다.
이것을 입춘첩立春帖이라 하며, 또는 입춘축立春祝이라고도 합니다. 궁중에서는 설날에 내전內殿 기둥과 난간에다 문신文臣들이 지은 연상시延祥詩 가운데 좋은 것을 뽑아 써 붙였는데 이를 춘첩자春帖子라 불렀습니다.
절기상으로 입춘은 동지冬至 이후 음陰의 기운을 지니던 대지가 양陽의 기운을 갖기 시작하며 모든 사물이 왕성히 생동하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입춘 전날이 절분節分인데 이것은 철(시절時節, 계절季節)의 마지막이란 뜻입니다. 이날 밤을 ‘해넘이’라 부르고, 콩을 방이나 문에 뿌려 악귀를 쫓고 새해를 맞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절은 아직 겨울인지라, 마음으로는 봄이라지만 추위가 강하여 ‘입춘추위’라는 말이 있으나, 가시지 않은 찬 기운이 봄에 따사로움으로 변하기를 기대하는 심정에서 연유된 말이며 풍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입춘을 맞으면서 입춘축立春祝이 의미하는 좋은 일들이 가내家內에 만당滿堂하기를 기원祈願하는 뜻에서 몇 가지 예를 소개합니다.
“입춘대길건양다경立春大吉建陽多慶”이란 입춘에는 크게 좋은 일이 있고, 새해가 시작함에 경사스런 일이 많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수여산부여해壽如山富如海”란 산처럼 장수하고 바다처럼 부유해지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소지황금출개문만복래掃地黃金出開門萬福來”란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온갖 복이 들어오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부모천년수자손만세영父母千年壽子孫萬歲榮”이란 부모님은 오래 사시고, 자손은 길이 영화를 누리기 바란다는 뜻입니다.
“용수오복호축삼재龍受五福虎逐三災”란 용은 오복을 들여오고 호랑이는 재앙을 쫓아낸다는 뜻입니다.
“국태민안가급인족國泰民安家給人足”이란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하여 집집마다 풍족하고 사람마다 넉넉하다는 뜻입니다.
“우순풍조시화풍년雨順風調時和豊年”이란 절기가 순조로우니 화평하고 풍성한 세월이 되기 바란다는 뜻입니다.
“천하태평사방무일사天下泰平四方無一事”란 온 세상이 태평한 봄이요, 사방 어느 곳에도 탈이 없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입춘을 맞이하여 우리 영산 법화행자들께도 매일매일 대길大吉하고, 만사여의萬事如意하시길 바랍니다.
2월 8일은 부처님께서 출가出家하신 날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 카필라국의 정반왕 태자로 태어나 화려한 왕궁의 생활을 버리고 구도求道길에 나선 것이 바로 출가일인 것입니다. 후일 성도成道하셔서 부처님이 되시고 법륜法輪을 굴리셔서 일찍이 없었던 진리를 밝혀 불교가 있게 하셨으니, 만약 출가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불문佛門에 사대명절四大名節 출가절出家節이 있게 된 동기動機입니다. 불교에서는 출가절을 시작으로 탄신일 성도재일 열반재일을 사대명절로 삼고 있습니다. 그는 왕위를 계승할 태자이셨고 그 총명한 자질로 인해 온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셨을 뿐 아니라, 후에는 야수다라라는 아름다운 부인과 사랑하는 아들 라후라가 있었으며, 궁중 생활은 즐겁고 유복有福하여 복이라는 복은 모두 갖추고 계셨지만 싣달다悉達多 태자는 괴로워 하셨습니다.
'중아함경'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남이 늙고 병들어서 괴로움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다. 남이 죽는 것을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나는 남이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을 보고 그것을 내일로 여겨 괴로워하고 싫어하며, 부끄러워하고 나의 젊음에 대한 교만, 건강에 대한 교만, 수명에 대한 교만을 버렸다.” 곧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에 대해 싣달다 태자는 스스로 눈을 뜨심으로 세속의 부귀영화富貴榮華는 물거품 같은 것임을 아셨으니, 출가의 선택은 참으로 현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현명한 행동 그 이상의 것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더구나 태자의 신분으로서 왕궁의 생활을 포기하는 데에는 크나큰 결단이 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두를 버리고 출가하셨던 그 용기는 곧바로 마魔를 항복 받고 정등정각正等正覺을 이루신 큰 힘이 된 것입니다. 후세의 사람들이 싣달다 태자의 출가를 일러 “위대한 포기抛棄”라고 찬탄하고 있습니다.
출가는 이와 같이 속세의 삶을 떠나 불도에 나아가는 첫 관문이므로, 오늘날 불가에서 출가는 세속의 범부들이 삼보에 귀의하여 승려가 입문으로 출가일을 승려의 날이라고도 합니다. 출가에는 신출가身出家와 심출가心出家의 2가지가 있습니다. 소승교의 비구 비구니, 대승교의 보살승처럼 신출가는 실제적인 몸으로 출가함을 말합니다. 이에 비해서 참된 출가는 마음의 출가 곧 모든 형상과 이름의 고정인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심출가입니다. '발심수행장'에서는 “심중에 애욕 떠난 것을 사문이라고 하고, 세속에 연연하지 않는 것을 출가라고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법화경 본문本門에서는 석가모니불이 구원실성 본불本佛이심이 밝혀진 바, 부처님은 영원한 과거에 성불하신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날의 위대한 출가의 참된 의의가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원한 부처님이 법신法身이나 보신報身을 수적垂迹하여 역사적 불타佛陀인 응신應身으로 몸을 나투신 응화에 의依해서만 중생을 교화하실 수 있는 까닭이며, 영원한 본불本佛일지라도 출가하사 구도求道하신 일은 중생에 대한 자비의 실천을 보이신 것입니다. 싣달다 태자의 현명한 판단과 결연한 의지를 본받아 흐트러지기 쉬운 우리들의 신심을 가다듬어야 되겠습니다.
2월 15일은 부처님께서 2559년 전에 열반涅槃(니르와나Nirvana:멸滅, 적멸寂滅, 무위無爲, 공적空寂하여 안온하므로 적寂 생사고해를 멸하므로 멸滅, 멸도, 생사의 인과를 멸하고 생사의 고해를 건너는 것. 일체의 번뇌와 고통을 영원히 끊어 버린 경지. 원적圓寂, 무위, 무작, 무생, 해탈이라 번역)하신 열반절입니다. 물론 불문佛門의 사대명절의 하나로 부처님께서 몸소 적멸(죽음)에 대해 모범을 보이신 날입니다.
“이때 나와 여러 중승衆僧이 함께 영축산에 나와, 내가 중생에게 말하되, 항상 여기에 있어 멸하지 아니하건만 방편력을 쓰는 고로 멸滅과 불멸不滅이 있음을 나타내노라.”(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20)
시아급중승 구출영축산 아시어중생 상재차불멸 이방편력고 현유멸불멸
時我及衆僧 俱出靈鷲山 我時語衆生 常在此不滅 以方便力故 現有滅不滅
부처님께서는 무시무종無始無終 영원히 항상 이 사바세계에 머물러 계십니다. 그러한 부처님께서 왜 입멸入滅 돌아가시는 것일까. 이것이 커다란 의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는 것은 죽는다고 하지 않고 열반涅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열반과 범부凡夫의 죽음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죽는[入滅]형상은 모두 같지만 그 내용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간략히 말하면 열반은 생사生死를 내 뜻대로 자유롭게 하는 것이요, 죽음은 그 반대로 생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는 생사를 여의고 자기 마음대로 생사를 맞이하는 것이요, 하나는 생사를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따라 이 세상에 출생하시고 돌아가실 때에는 당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돌아가시는 것이니 이것이 곧 열반인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우리 중생들은 이 세상에 출생한 것은 출생하고 싶어서 출생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세에 지은 업의 분한分限에 의해서 출생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인간의 모습으로 출생하신 이상 무상한 현상의 육신은 인연에 의해서 변하여 멸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현상은 역사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보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신앙적으로 볼 때 이런 일반적인 설명만으로는 흡족 할 수가 없으니, 진실로 부처님의 열반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방법의 힘을 쓰기 때문)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왜 이러한 방편을 왜 쓰셨을까. 그것은 어리석은 중생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여래가 항상 있어 멸하지 않음을 보게 되면 곧 교만한 생각을 일으키어 싫어지며 게으름을 품어서 만나기 어려운 생각과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리라.”(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10)
약견여래 상재불멸 변기교자 이회염태 불능생어난조지상공경지심
若見如來 常在不滅 便起憍恣 而懷厭怠 不能生於難遭之想恭敬之心
“항상 나를 보는 까닭으로 교만하고 방자한 마음을 내며 방일하고 오욕에 착해서 악도 중에 떨어지기 때문이니라.”(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24)
이상견아고 이생교자심 방일착오욕 타어악도중
以常見我故 而生憍恣心 放逸著五欲 墮於惡道中
우리들은 만약 부처님께서 항상 살아계셔서 가까이 모시고 끊임없이 교훈을 받고 있다면, 으레 그러려니 하고 크게 어렵고 고맙게 생각지 않을 뿐 아니라, 교만한 마음 방자한 마음 게으른 마음이 생겨서 존경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만나기 어려운 일을 만났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 결과 생사해탈의 훌륭한 법문을 듣고도 실행에 옮기지 않아서 마침내 악도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항상 이 세상에 계시는 고마운 일이 중생에게는 도리어 해가 될 것이므로, 그들에게 큰 놀라움을 주시어 각성케 하여 부지런히 정진하게 하시고자 입멸에 드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중생들은 몹시 놀라고 평소에 그러려니 하던 어리석은 생각을 뉘우치고 참회하고 반성하여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에서는 부모가 계실 때에는 부모가 보살펴 주심에 소홀히 예사로 생각하고 허물없이 되어서 이르는 말도 잘 듣지 않던 자식들이 뜻밖에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면 그제야 슬퍼하고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래수량품에는 독약을 먹고 본심을 잃은 아들들이 뜻밖에 먼 외국에 나가있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만약 아버지가 계시면 우리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생각하시어 능히 구해서 지켜주시련만 지금은 우리를 버리시고 먼 다른 나라에 가셔서 세상을 떠나셨도다.”(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16)
약부재자 자민아등 능견구호 금자사아 원상타국 자유고로 무부시호
若父在者 慈愍我等 能見救護 今者捨我 遠喪他國 自惟孤露 無復恃怙
라고 슬퍼하여 마침내 본심을 되찾았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중생은 부처님의 입멸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그 만나기 어려움을 알고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진리를 알고자하는 마음이 생겨서 비로소 선근을 닦게 되는 것이므로, 부처님은 불멸이시지마는 방편으로 열반의 상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항상 이 사바세계에 계시지마는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하여 입멸을 보여 주시는 것을 현멸現滅의 대자大慈라고 합니다. 중생을 위해서 나타나시고 사라지시고 하는 큰 자비야말로 부처님의 무한한 자비입니다. 이러한 대사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진정한 뜻은 끝내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영산법화사 사부대중 여러분!
입춘절과 출가일 열반일이 들어있는 2월을 맞아, 일터에서는 부지런히 일하고 도량에서는 열심히 정진하여 법화경의 진실한 뜻을 깨우쳐서 무량공덕과 구원실성 석가모니불의 가피가 항상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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