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라집법사의 초치(招致)

 후진(後塵)의 후량(後凉) 토벌의 목적은 후량의 국가 정복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라집법사의 초치(招致: 불러서 오도록 함)가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후진의 후량토벌에 있어서는 전진의 서역원정이 그 영향을 끼쳤을 것이지만, 라집법사의 초치가 큰 원인이었다고 주장해도 좋을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인접한 여러 국가들, 특히 서역 제국에 책봉 체제를 수립하고 유지하려고 하는 후진 요흥의 문화 정책의 하나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401년 5월, 농서공 석덕(碩德)은 서진의 걸복건귀(乞伏乾歸)의 7천 기병을 선봉으로 삼고, 보병 6만을 인솔하여 후량을 토벌하도록 했다. 서진의 옛 도읍이었던 금성(金城: 감숙성 고란현)에서 황하를 건너 광무(廣武)에 이르고, 다시 오랜 행군 끝에 고장성으로 압박해 갔다.
이에 대해 후량은 보국대장군 여초(呂超)와 용양장군 여막(呂邈)이 인솔하여 대비하고 있었다. 후진의 군(軍)엔 상대가 될 수 없을 정도였다. 후량의 군은 전쟁 초에 이미 패퇴하게 되었고 여막 자신은 산채로 붙잡히고 말았다. 사로잡히고 참살당한 자가 1만이나 되었다.
이를 본 서량의 이고(李暠 357〜417, 재위 400〜417), 남량의 독발리록고(禿髮利鹿孤 ?〜402, 재위 399〜402), 북량의 저거몽손(沮渠蒙遜) 등은 조공 사신을 보내와 축하를 하며 그 위세에 아첨하는 정도가 되었다.
 얼마되지 않아 후량 국내에도 이반자가 나타났다. 마침내, 후량 왕실의 파서공 여타(呂佗)가 동원(東苑)의 무리 2만 5천인을 데리고 후진에 투항했다. 게다가 국왕 여융(呂隆)의 아우 안정공의 여초의 암살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300여 호의 관련자가 처형되는 사건마저 발생하여 안팎으로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여초는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후량의 실력자로서 국왕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하고 있다.

지금 전쟁이 계속되어 자원은 다해가고 강한 적들은 밖에서 계속 핍박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동요하여 호구도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경우는 가령, 장량(張良) ․ 진평(陳平) ․ 한(韓) ․ 백(白) 들도 또한 이것을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페하, 마땅히 권변대강(權變大綱: 좋은 방책)을 생각하시어, 구구한 염려는 버리시고 구차하더라도 좋은 세상을 기약하신다면 화친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천명(天命)을 버린다면 종족(宗族)을 온전히 보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서} 여융재기)

 곧 여초는 국왕인 여융에게 후진에 귀복할 것을 이와 같이 진언하고 있다.
이리하여 그해 9월, 뜻을 정하고 국왕 여융은 후진에 귀복을 청하여 사자를 장안에 보냈다.
{고승전}에는 이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5월에 요흥이 농서공 요석덕을 파견하여 서역의 여융을 정벌하도록 했다. 마침내 여융의 군대를 대파하자, 9월에 여융은 표문을 지어서 항복을 하였다. ({고승전} 제2권, 라집전)

 이에 장안의 요흥(姚興)은 여융을 그대로 고장(姑臧)에 머물면서 자치를 허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융에게 양주자사 건강공(建康公)에 임명했다. 그런데도 후량의 연호 신정(神鼎)을 그대로 사용하게 했다. 이것은 후진이 후량 지배에 있어서 지극히 관대한 통치방식 기미정책(覊縻政策-고삐를 쥐는 정책)을 가지고 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 하더라도 요흥은 후량측에 국왕 여융의 일족과 문무 구신들 50여 가를 인질로 장안에 보내도록 요구했다. {진서} 여융재기에는 다음과 같이 그 사정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어머니, 아우, 사랑하는 아들, 문무의 구신 모용축(慕容筑,) 양영(楊穎), 사난(史難), 염송(閻松) 등 50여 가를 장안에 보내 그들은 인질이 되었다.

 라집법사는 놀랍게도 그때 인질들로 내 보냈던 일단(一團)의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인물로서 라집과 그를 따르는 승조(僧肇) 및 몇몇 사람들은 다른 인질들과는 다른 정중한 대우를 받으면서 장안에 들어왔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출삼장기집}에는 “장안에 도착하자, 요흥은 국사의 예(禮)로 극진히 그들을 대우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때 {십육국춘추집보(十六國春秋輯補)} 후진록에서는 401년 11월에 장안에 들어 왔다고 하고, {고승전},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 {백론서소(百論序疏)},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정원석교록(貞元釋敎錄)}, 그리고 라집의 애제자 승예(僧叡)의 {대지석론(大智釋論)}, {대품경서(大品經序)}, {관중출선경서(關中出禪經序)} 등에서는 같은 해 12월 20일이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는 후자설을 따르기로 한다.


제10장 장안(長安)에서의 번역 활동

   1. 소요원(逍遙園) 번역장(飜譯場)

 라집법사가 장안에 와서 활약한 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의거해 왔던 {출삼장기집} 제 14권 라집전과 {고승전} 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