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밝게 관하여 불쌍히 생각하고 큰 자비심을 내어 곧 구해 내고자 하며(금장본 무량의경 설법품 제2 p1046)
보살마하살 여시제관 생연민심 발대자비 장욕구발
菩薩摩訶薩 如是諦觀 生憐愍心 發大慈悲 將欲救拔
[강의] 이 구절은 행을 이루는 보살발심을 밝힌 것이다.
“이와 같이 잘 관하여”란 위에서는 삼제(三諦)의 경계를 잘 관하고, 아래는 육취(六趣)의 경계를 잘 관함이다.
“불쌍한 마음을 낸다”란 삼제(三諦)의 경계를 요달하지 못함을 불쌍히 여김이다. “대자비(大慈悲)를 낸다”는 것은 자비를 주어 육취(六趣)의 경계에서 구해냄이다. 대(大)란 무연자비(無緣慈悲)의 뜻이다.
“장차 구해내려 한다”란 대비를 근본으로 삼아서 이사(二死)의 고를 뽑아내고, 발심을 인(因)으로 삼아서 오주(五住)의 번뇌를 구해냄이다.
[경] 또 다시 깊이 일체의 모든 법에 들게 함이라.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이와 같은 법을 낳음이라.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이와 같은 법이 머무름이라.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이와 같은 법을 다르게 함이라.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이와 같은 법을 멸함이라.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능히 악법(惡法)을 낳게 하며,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능히 선법을 낳게 함이라. 머물게 되는 것도 다르게 되는 것도 멸하게 되는 것도 또 다시 이와 같음이라.
(금장본 무량의경 설법품 제2 p1046)
우부심입일체제법 법상여시생여시법 법상여시주여시법 법상여시이여시법 법상여시멸여시
又復深入一切諸法 法相如是生如是法 法相如是住如是法 法相如是異如是法 法相如是滅如是
법 법상여시능생악법 법상여시능생선법 주이멸자역부여시
法 法相如是能生惡法 法相如是能生善法 住異滅者亦復如是
[강의] 두루 일체경계에 대해서 앎을 들었다.
“깊이 들어간다”고 한 것은 법성의 끝에 들어감이다. “일체 모든 법”이란 천여(千如)의 인과를 말한다.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라고 한 것은 변하지 않는 진여 곧 불변진여를 말한다. “이와 같은 법을 낳음이라”는 수연진여(隨緣眞如)이니 연을 따르는 진여를 말한다. 이는 곧 첫째로 큰 법의 상이 생기는 것을 든 것이다.
다음에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라고 한 것은 또한 불변진여를 든 것이다. “이와 같은 법이 머무름”이란 또한 수연진여를 든 것이다. 이는 곧 둘째로 큰 법의 상이 머무름을 든 것이다.
다시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라고 한 것은 또한 불변진여를 든 것이다. 다음에 “이와 같은 법을 다르게 함이라”는 또한 수연진여를 든 것이다. 이는 곧 셋째의 큰 법의 상이 다르게 됨을 든 것이다.
다음의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라고 한 것은 또한 불변진여를 든 것이다. 다음에 “이와 같은 법을 멸함”이란 또한 수연진여를 든 것이다. 이는 곧 넷째의 큰 법의 상이 멸함을 든 것이다.
다음의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라고 한 것은 또한 불변진여를 든 것이다. 다음에 “능히 악법(惡法)을 낳게 하며”란 또한 수연진여를 든 것이다. 이는 곧 무명연기가 악법이라는 것이다.
다음에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라고 한 것은 또한 불변진여를 든 것이다. “능히 선법을 낳게 함”이란 또한 수연진여를 든 것이다. 이는 곧 법성연기가 선법이라는 것이다. 선법이 생기고 악법이 생기는 것도 모두 생기는 상이다.
“머물게 되는 것도 다르게 되는 것도 멸하게 되는 것도 또 다시 이와 같음”이란 악법이 주하고 선법이 주하고, 악법이 다르게 되고 선법이 다르게 되고, 악법이 멸하고 선법이 멸하는 것 그 뜻이 이와 같음이다.
[경] 보살은 이와 같이 네 가지 상(相)의 처음과 끝을 관하여 살피고 모든 것을 두루 알고(금장본 무량의경 설법품 제2 p1046)
보살여시관찰사상시말 실변지이
菩薩如是觀察四相始末 悉遍知已
[강의] 이 구절은 큰 네 가지 상[大四相]을 맺었다.
모태에서 출생하는 것을 낳는 상[生相]이라 하고 오온이 상속하는 것을 머무는 상[住相], 오온이 쇠멸해서 변해가는 것을 다르게 되는 상[異相], 일기의 생명이 끝남을 멸하는 상[滅相]이라고 한다. 무명(無明)은 사상(四相)의 시작이고, 노사는 사상의 끝마침이다. 무명은 곧 법성의 체이고, 노사도 곧 법성의 체이다. 세 가지 도는 곧 삼불성이고, 세 가지 불성은 삼덕이 된다. 선법으로 능히 삼도를 깨달아 알면 곧 삼신 삼덕이니, 이런 까닭에 “모든 것을 두루 안다”고 하였다.
[경] 다음에 또 일체의 모든 법은 순간순간도 머무르지 않으며, 새로이 새롭게 나고 멸함을 밝게 관하고,(금장본 무량의경 설법품 제2 p1046)
차부제관일체제법 염념부주신신생멸
次復諦觀一切諸法 念念不住新新生滅
[강의] 이 단락은 생 같고 멸 같음을 밝힌 것이다.
“일체의 모든 법”이란 세간과 출세간의 인과법으로, 영원히 수연진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순간순간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잠시 연을 따르므로 이를 “새로이 새롭게 나고 멸한다”고 하였다.
[경] 또는 곧 나고 머물고 달라지고 멸함을 관하라.
(금장본 무량의경 설법품 제2 p1048)
부관즉시생주이멸
復觀卽是生住異滅
[강의] 이 구절은 작은 사상[小四相]을 밝힌 것이다.
“즉시”란 찰나시를 말한다. 일찰나 중에 또한 생하고 또한 주하고 또한 달라지고, 또한 멸하니 작은 상에 사상이 있고 큰 상에 사상이 있어서 모두 합하여 8상이 있다. 팔상으로 사물이 변하여 전후를 측량하기 어려우니 오직 여래만이 지견으로 능히 알고 능히 보신다. 이런 까닭으로 보살은 하나하나의 법문마다 무량한 뜻과 지혜로 큰 사상을 관하고 작은 사상을 관한다.
[경]이와 같이 관하고서(금장본 무량의경 설법품 제2 p1048)
여시관이
如是觀已
[강의] 이 한 구는 위의 사상의 일을 맺었다.
[경] 중생의 모든 근기와 성품과 욕망에 들어갈지니라. 성품과 욕망이 한량없는 고로 설법도 한량이 없느니라. 설법이 한량없는 고로 그 뜻도 또한 한량없느니라.(금장본 무량의경 설법품 제2 p1048)
이입중생제근성욕 성욕무량고 설법무량 설법무량고 의역무량
而入衆生諸根性欲 性欲無量故 說法無量 說法無量故 義亦無量
[강의] 이 부분은 가르침이 일어남을 밝혔다.
“이(而)”란 그러나 [然而]의 뜻이다.
“중생의 모든 근기와 성품과 욕망에 들어간다”에서 들어감이란 깨달아 들어감[悟入]이다.
“중생들”이란 계내(界內)와 계외(界外)의 십계(十界) 중생이다.
“모든 근기”란 계내의 이사(理事)의 근기와 계외의 이사의 근기이다.
“성품과 욕망”이란 과거에서 익혀온 것을 성품이라 하고, 현재 즐기는 것은 욕망이라 한다. 욕망을 익혀서 성품이 되고 성품이 이루어 습욕(習欲)이 생긴다. 또 과거를 근기라 하고 현재를 욕망이라 하고, 미래를 성품이라 한다.
“성품과 욕망이 한량없는 고로 설법도 한량이 없다”는 것은 앞의 사미(四味)에서 설한 8교 등이다.
“설법이 한량이 없는 고로 그 뜻도 또한 한량없다”는 것은 화엄에서 설한 별교 원교의 양교(兩敎), 능전(能詮) 소전(所詮), 체용(體用) 인과(因果) 권실(權實) 등의 여러 가지 뜻이다. 4아함에서 설한 갖가지 뜻과 방등부에서 설한 갖가지 뜻과 반야부 등에서 설한 갖가지 뜻이다. 앞의 사미중에서 설한 여러 가지 뜻이란 이른바 사종(四種) 십이인연의 뜻, 사종사제(四種四諦)의 뜻, 칠종이제(七種二諦)의 뜻 오종삼제(五種三諦) 등의 뜻이다. 이와 같은 뜻이 성품을 따라 무량하다.
[경] 무량의(無量義)는 하나의 법에서 나며 그 하나의 법은 곧 무상(無相)이라. 이와 같은 무상은 상이 없고 상이 아니니라. 상이 아니며 상이 없음을 실상(實相)이라 하느니라.(금장본 무량의경 설법품 제2 p1048)
무량의자 종일법생 기일법자 즉무상야 여시무상 무상불상 불상무상 명위실상
無量義者 從一法生 其一法者 卽無相也 如是無相 無相不相 不相無相 名爲實相
[강의] 여기부터는 세 가지 물음 중에 둘째 무량의 뜻을 물은 것이다. “무량의(無量義)는 하나의 법에서 나온다”고 말한 것은 무량한 뜻이 생겨남을 들어서 하나의 무상(無相)이 생한 것임을 보여주었다. “곧 무상이다”란 유위(有爲)의 물듦과 청정한 모습이 없음이다. “이와 같은 무상은 상이 없어서 상이 아니다”란 이는 곧 무상(無相)을 밝힌 것이다. “상이 없어서 상이 아니다”란 연을 따르는 진여[隨緣眞如]이다. 그 수연진여란 둥근 거울 면에 일체 형체와 물건들이 따라와 모습을 나타냄과 같다. 진여의 수연(隨緣)도 또한 이와 같으니, 일체 물들고 청정한 상을 따라 와 또한 능히 상이 있게 된다. 이런 까닭에 상이 없고 상이 아니라고 이름한다. “상이 아니고 상이 없음을 실상(實相)이라 한다”란 이는 실상을 밝힌 것이니, 상이 아니고 열반이 아니므로 상이 아니라고 했고, 생사가 없으므로 상이 없다[無相]고 했다. 무상은 곧 이 중에 이름을 실상이라 한다.
[경]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진실한 상에 편안히 머물러서 일으키는 자비는 밝고 밝아서 헛되지 아니하니라. 능히 중생에게서 참으로 능히 고를 뽑음이라. 고를 이미 뽑고는 다시 법을 설해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쾌락을 받게 하라.(금장본 무량의경 설법품 제2 p1048)
보살마하살 안주여시진실상이 소발자비명제불허 어중생소 진능발고 고기발이 부위설법
菩薩摩訶薩 安住如是眞實相已 所發慈悲明諦不虛 於衆生所 眞能拔苦 苦旣拔已 復爲說法
영제중생수어쾌락
令諸衆生受於快樂
[강의] 여기서는 실상의 작용을 밝힌다.
“보살마하살”은 잘 편안히 머무름을 든 것이다.
“편안히 머무른다”는 것은 마음에 작의(作意)함이 없이 항상 실상에 노닌다.
“이와 같은 진실한 상에”란 보살마하살이 머무를 진실한 상을 든 것이다. 곧 십여(十如)는 십여시의 경계이다.
“일으키는 자비”란 사덕의 안락과 함께 함을 자慈(자애)라 하고, 오주(五住)의 고를 제거함을 비悲(불쌍히 여김)라 한다.
“밝고 밝아서 헛되지 아니하리라”는 밝고 밝음은 진리에 환하다는 뜻이며, 헛되지 않다는 것은 진실하다는 뜻이다.
“능히 중생에게서”란 건져야 할 중생을 든 것이다.
“진실하게 고를 없앰이라”란 능히 제거하는 비(悲)의 효력을 든 것이다.
“고를 이미 없애고는 다시 법을 설해서”란 요인불성 종자를 든 것이다.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이란 받는 중생을 든 것이다.
“쾌락을 받게 하느니라”란 받아야할 자(慈)의 효력(안락의 즐거운 효력)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