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가지가지 연(緣)의 하나하나 속에도 또한 가지가지의 연이 모두 합해진 속에서도 그 연의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지가지 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지가지의 연에서 생기는 것이 있는가.

12. 만약 “그것(결과)은 [가지가지의 연 속에 존재한다면]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연 속에서 나타난다고 한다”고 한다면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결과는 연이 없는 것 속에서도 어째서 나타나는 것일까.
 
13. 만약 “결과는 연이 변화해서 성립한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 연은 자존(자신 스스로에 의해서 성립)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만약 결과가 자존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연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그 결과는 어째서 연이 변화해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14. 그렇기 때문에 결과는 연이 변화해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연이 아닌 것이 변화해서 나타난 것 등도 있을 수 없다. 결과가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연과 연이 없는 것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제2장 운동(가는 것과 오는 것)의 고찰

 우주만물의 움직임은 오고 가는 것들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도 오는 것이고 가는 것이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것도 오고 가는 것이다. 또한 물체가 이동하는 것도 오고 가는 것이다. 중론에서는 이러한 모든 존재의 오고 감의 실상을 알자는 것이다. 곧 오는 것이나 가는 것은 모두 연기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緣起)의 실상에서 보면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불래 불거(不來不去)라 한다.
 여기서는 이중에서 간다고 할 때 먼저 3세에서 “감”의 진의를 밝히고, 이어서 가는 주체와 가는 움직임을 들어서 감의 실상을 밝히고 있다.
 먼저 간다는 것은 ‘이미 간 것’과 ‘현재 가고 있는 것’, 그리고 ‘아직 가지 않은 것’의 세 가지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미 간 것”이란 이미 지나가버린 움직임으로 지금 존재하지 않아서 결코 만날 수 없다. “아직 가지 않은 것”이란 아직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의 움직임도 역시 현재에 존재할 수 없다. 또한 “현재 가고 있는 것”을 살펴보면 현재 가는 것이 이미 지나간 것이거나 아직 오지 않은 것일 뿐이다. 곧 이미 간 것이나 아직 가지 않음을 떠나서 현재의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곧 과거 현재 미래의 간다는 것은 연기하기 때문에 실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가는 주체와 가는 움직임을 통해서 살펴보면, 우리가 간다고 할 때, ‘가는 주체’가 간다거나 ‘가는 움직임’이 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가는 자의 주체’는 ‘가는 움직임’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고, ‘가는 움직임’은 ‘가는 주체’가 없으면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곧 이들은 연기관계에 있어서 독립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1. 우선 이미 지나간 것[已去]은 감이 아니다. 또한 아직 가지 않은 것[未去]도 감이 아니다. 다시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서 ‘현재 가고 있는 것[去時]’도 감이 아니다.
[제1게송의 후반, “현재 가버린 것이 가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라고 반대자가 제2게송을 서술한다.]

2. 움직임이 있는 곳에서는 가는 움직임이 있다. 그러한 움직임은 ‘현재 가고 있는 것[去時]’에 있어 ‘이미 가버린 것’도 ‘아직 가지 않은 것’도 없기 때문에 ‘현재 가고 있는 것’ 속에 가는 움직임이 있다. [제2시에 대해서 나가르주나는 답한다]

3. ‘현재 가고 있는 것’의 속에 어째서 ‘가는 움직임’이 있다고 하는가. ‘현재 가고 있는 것’ 속에 2가지의 ‘가는 움직임’은 있는 것이 아니다.

4. ‘가고 있는 것’에 가는 움직임[去時]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고 있는 것이 지나가기 때문에, 가는 움직임이 없어지고, ‘가고 있는 것’이 있다고 하는 [오류]가 부수해서 온다.
 만약 “가고 있는 것이 사라진다”고 하는 주장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가고 있는 것’이 ‘가는 움직임’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되지만, 이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5. ‘가고 있는 것’에 ‘가는 움직임’이 있다면 두 종류의 가는 움직임이 부수(部數)해서 온다. 곧 ‘가고 있는 것’을 있게 하는 가는 움직임과 또한 ‘가고 있는 것’에 있어서 가는 움직임이 있다.
*곧 만약 “가고 있는 것이 사라짐”이라고 한다면 주어의 “가고 있는 것”의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라짐”과 새로운 술어로서 부가된 “사라짐”이라는 두 가지의 ‘가는 움직임’이 부수하는 것이 된다. 중론 「관거래품」의 게송에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만약 가는 자를 떠나서보면 가는 법(움직임)은 이루어질 수 없다.
가는 움직임이 없는데 어떻게 가는 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若離於去者 去法不可得 以無去法故 何得有去者 -MK. 2-7-)

6. 2가지의 가는 움직임이 부수한다면 다시 두 가지의 ‘가는 주체[去者]’가 부수한다. 왜냐하면 가는 주체를 떠나서는 가는 움직임은 없기 때문이다.

7. 만약 ‘가는 주체’를 떠나서는 ‘가는 작용’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가는 작용’이 존재하지 않으니 어떻게 ‘가는 주체’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가는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8. 우선 ‘가는 주체’는 가지 않는다. ‘가는 주체가 없는 것’도 가지 않는다. 그래서 ‘가는 주체’도 없고, ‘가는 주체가 없는 것’도 없어서 양자와는 다른 어떠한 제3자가 가는 것이 있는 것인가.

9. 우선 ‘가는 것이 지나간다’고 하는 것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가. ‘가는 작용’이 없어서는 ‘가는 주체’는 성립하지 않는다.

10. ‘가는 것이 지나간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가는 작용’이 없다고 해도 ‘가는 주체’가 있다”고 하는 잘못된 결론이 부수해서 일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가는 사람’이 다시 ‘지나간다’고 하는 움직임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11. 만약 ‘가는 사람이 지나간다’고 말한다면 두 가지의 지나가는 작용이 있다고 하는 것이 되고 만다. 곧 그 ‘가는 움직임’에 근거해서 ‘지나가는 것’이라고 부르는 곳에 그 ‘가는 움직임’과 ‘지나가는 것’에 있는 사람이 지나가는 곳에 그 ‘가는 움직임’이 있다.

12. 이미 가버린 곳에 지나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아직 지나가지 않은 곳에도 지나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지금 나타나서 가고 있는 곳에도 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어디에서도 지나가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13. 가는 움직임을 개시하는 이전에는 지금 나타나서 가고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이미 지나간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지금 나타나서 가고 있는 것’과 ‘이미 지나가버린 것’]에 있어서 ‘가는 움직임’이 없다고 한다. 아직 가지 않은 것에서 어떻게 ‘가는 움직임’이 있다고 하는가.

14. ‘이미 지나간 것’에서도, ‘지금 나타나서 가고 있는 것’에서도, ‘아직 가지 않은 것’에서도 가는 움직임을 개시하는 일이 어떻게 해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미 가버린 것’ ‘지금 나타나서 가고 있는 것’ ‘아직 가지 않은 것’을 어떻게 구별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15. 우선 제1의 ‘떠나가는 주체’가 주(住)한다고 하는 일은 없다. 또한 ‘가는 주체가 없는 것’도 주(住)한다고 하는 일이 없다. ‘가는 주체’에도 없고 ‘가는 주체에 없는 것’에도 없는 곳의 양자와는 다른 어떠한 제3자가 주(主)하는 것일까.

16. ‘가는 움직임’이 없어진다면 ‘가는 주체’가 성립하지 않을 때, 우선 ‘가는 주체가 주한다’고 하는 일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을까.

17. [‘가는 주체’는] ‘지금 현재 가고 있는 곳’에서 물러나 주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미 가버린 곳’에서 물러나 주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아직 가지 않은 곳’에서 물러나 주하는 것도 아니다. ‘주하는 것’의 행하는 것도 활동하는 것도 쉬어 그치는 것도 ‘가는 것’의 경우도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18. 가는 움직임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가는 주체에 있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가는 주체가 가는 움직임과도 다르다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

19. 만약 가는 움직임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가는 주체에 있다고 한다면 작용하는 주체와 작용하는 움직임이 일체로 있는 것이 되고 만다.

20. 또한 만약 ‘가는 주체’는 ‘가는 움직임’과 다르다고 분별한다면 ‘가는 주체’가 없어져도 ‘가는 움직임’이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가는 움직임’이 없어져도 ‘가는 주체’가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21. 일체로 있다고 해도 별체에 의해서도 성립하지 않는 [‘가는 움직임’과 ‘가는 주체’와의] 두 가지는 어떻게 성립할 수 있을까.

22. ‘가는 움직임’에 의해서 ‘가는 주체’로 부른다면 그의 ‘가는 주체’는 그의 ‘가는 움직임’을 지나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가는 주체’와 ‘가는 움직임’에 의해서도 이전에 [성립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실로 어떤 사람이 어디에 간다고 할 수 있을까.

23. ‘가는 움직임’에 의해서 ‘가는 주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의 ‘가는 주체’는 그의 [‘가는 움직임’과는] 서로 다른 ‘가는 움직임’을 가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아갈 때 두 개의 ‘가는 움직임’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론 「관거래품」 게송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만약 가는 자가 가고 있다면 두 가지의 감이 있다.
첫째는 가는 자의 감이고, 둘째는 가는 법(움직임)의 감이다.
(若去者有去 則有二種去 一謂去者去 二謂去法去 -MK. 2-10-)

24. ‘가는 주체’가 실재하는 것이라면 [실재하는 ‘가는 움직임’과 실재하지 않는 ‘가는 움직임’과 실재하고 수승한 실재하지 않는 ‘가는 움직임’이라는] 세 종류의 ‘가는 움직임’[은 아무래도] 가는 일이 없다. 또한 ‘가는 주체’가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있다고 해도 [위에서 서술한] 3가지의 ‘가는 움직임’[은 아무래도] 가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

25. 또한 ‘가는 주체’가 실재하고 수승한 실재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해도 [위에 서술한] 세 가지의 ‘가는 주체’와 ‘움직여야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