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오해하기 쉬운 공
그런데 이 연기설의 진의를 체득하지 못하고 공을 특수한 것으로 혹은 원리로 보기 쉬운 것이 일반적인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관파는 여러 가지의 비유를 사용해서 공견에 떨어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중론에서는 공견은 “불완전하게 붙잡은 뱀” 혹은 “미완성의 주술”로 비유하고 있으나(제24장 제11시), 대지도론이나 핑가라(청목) 주석에는 약독(藥毒)의 비유로 표현되고 있다. 곧 약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마시는데 만약 병을 다스리고 나면 약이 체내에 머물지 말고 밖으로 배출되어야 할 텐데 배출되지 않는다면 또한 병을 일으키게 되는 것과 똑같이 공은 번뇌를 멸하기 위해서 설하는 것인데 그런 공에 집착한다면 도리어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마는 것이니 이를 “공견에 떨어졌다”고 설하고 있다.(대지도론3권 대정장 25, p.288)
또한 핑가라의 주석을 보면 다시 번뇌의 불은 공의 물을 가지고 끌 수 있는 것인데 만약 물에서 불이 나온다면 이것을 끄는 수단이 없는 것처럼 공견에 떨어진 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구제할 도리가 없다고 한다(대정장 30권, p.18하). 또한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주석은 대보적경(大寶積經) 속에서 공견을 논파하고 있는 유명한 한 구절을 인용하여 논하고 있다(뿌라상가빠다, p.248) 여기를 보면 당시 공을 오해했던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중관파가 극력으로 공견을 배척하기 위하여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름지기 공견이란 공이 연기를 의미하고 유와 무의 대립을 넘어서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으나, 이것을 대립의 입장으로 끌어내려서 생각하는 것이다. “공 또한 다시 공”이란 이와 같이 공견을 배척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말하는 부정, 예를 들면 스피노자의 “negatio negations(부정에 대한 부정)”, 혹은 헤겔의 “negation der negation(부정의 부정)”과는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헤겔철학은 동서 학자들에 의해서 자주 인용되고 있으나 그것과 나가르주나의 사상과는 상당히 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한의 부정을 계속해서 정반합의 과정을 지나서 궁극의 목적을 향하여 발전해 간다고 하는 헤겔의 사상은 중론속에서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중론에 있어서 “공 또한 다시 공”은 상호의존의 설에서 떠나서 고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⑥ 무와 공
위에서 유 무 공이라고 하는 세 가지 개념의 관계에 대해서 산발적으로 설하였으나, 이제 최후의 문제가 남아 있다. 무와 공은 충분히 구별해야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해서 반야경을 보면 제법의 무를 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문구가 적지 않다.
거기서 반야경은 제법의 공을 설하고 있지만 그것은 곧 무의 의미이기 때문에 공과 무를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무는 무자성의 의미라고 할 수 있고, 공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지만 “무자성”이라고 하는 말은 역시 “무”라고 하는 개념규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문도 반야경의 문구 자신에 의해서 해결되고 있다고 생각된다(예를 들면 대반야경」372권 대정장6권, p.926상).
여기에 의하면, 일체법은 무이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유와 무를 떠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보여지는 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후자의 무는 유와 대립했던 무이다. 전자의 무는 그러한 대립을 떠나 있는 무이다. 그리고 무라고 하는 개념은 반드시 유라고 하는 개념을 예상하고 그것과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후자의 무가 진실한 의미에서 무이며, 전자의 무와 대립을 떠나 있는 것에 대해서 임시로 명명한 것이다. 곧 전자는 불가설에 있는 임시로 “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요, 공과 동의어이다. “무소유”라고 하는 말도 이 의미로 이해할 수가 있다.
또한 무자성이라는 말 속에 있는 “무”라고 하는 의미도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반야경 속에서는 자주 여러 가지 사물의 무가 설해지고 있지만 이것은 대립 속에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범부의 입장을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임시로 설해진 것인데 공과는 동의어 이고 유와 대립한 무와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궁극의 공은 부정을 계기로 했던 것이다. 때문에 공을 설했다고 하는 것도 실은 하나의 방편인 것이다. 공을 절대시 한다면 그 순간에 공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⑦ 제법실상(諸法實相)
그런데 공에 연관해서 문제되는 것은 “제법실상”의 관념이다. 나가르주나와 그 계통의 사람들은 “제법실상”을 설했다고 옛날부터 말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끝으로 그 의미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구마라집도 중론을 번역하는 가운데 이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원어를 조사해 보면 구마라집은 반드시 동일한 원어를 이와 같이 번역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법화경 팔천송반야 십만송반야」 속에서 제법실상 또는 실상의 원어를 찾아보면 대략 다섯 종류로 분류할 수가 있다.
제1부류는 법성(dharmatā)이라고도 번역되는 원어의 구룹에서 “법의 본질”을 의미한다. 법성은 연기의 이법이 정해져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제2부류는 진여(tathatā)라고 번역되는 말로 그 의미는 “그러한 것”을 뜻한다. 이것도 무자성 공 등의 동의어가 있다.
제3부류는 실제(實際 bhūtakoṭi)와 동의이거나 이것에 가까운 의미이다. 그것도 “법성” “ 진여”와 같은 뜻인데 제법실상의 이명(異名)이고 공과 동의어이다. 실제란 법이 그것에 의해 성립하는 근거가 되는 동시에 중생이 이것에 깨달아 들어가고 복귀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제4부류는 법의 자성(dharmasvabhāva), 혹은 자성(prakṛti)의 구룹이다. 중관파에서는 법은 서로 의존해서 성립한다고 설해진다. 따라서 “법의 자성”은 “제법의 상의(相依)” 곧 공으로 설하는 데 이르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연기의 여실한 상 곧 상의 혹은 상호한정을 의미한다.
제5부류는 진성의 특징(tattvassya lakșaṇa)의 구룹에 속한다. 여기서 진성(tattva)의 의미가 문제가 되지만 그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그것인 것” 이다.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주에 의하면 공과 동의어이다. 또한 “제법의 자성”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이것도 연기의 여실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법실상의 원어는 많이 있지만 모두 동일한 의미, 곧 제법이 서로 의존하거나 한정하면서 성립해 있는 여실상을 의미하며, 이것은 연기와 같은 의미인 것을 알 수 있다.
중론 가운데 가장 명료하게 제법실상을 설하고 있는 곳은 제18장 관법품일 것이다.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이나 구마라집의 번역에 비추어 보면, 그곳에서 생불은 “연해서 생긴 것이 그대로 제법실상으로 간주되며” 연기에 대해서 팔불(八不)이 설해지는 것과 같이 제법실상을 불멸 불일불이 불상부단 불일불이라고 설하고 있다.
또 중론 제18장 제9 시에서는 “다른 것에 연하지 않고 적멸인 것, 희론에 의해서 희론되지 않는 것 무분별이고 다양하지 않은 것, 이것이 진리의 모습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도 중론의 귀경게에서 보이는 희론이 적멸하여 길상인 연기와 내용적으로는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법실상의 의미는 “다른 것을 연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곧 언어에 의해 표현될 길이 없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와 같이 제법실상에 대한 설명은 결국 연기에 대한 다른 설명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앞에서 검토한 내용을 화엄경에서 설명하는 실상이나 제법실상에 적용해 보면 그대로 상통함을 알 수 있다. 종래의 동북아시아 불교학에서는 연기와 제법실상이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여겨왔지만, 본래 그 양자는 동일한 취지인 것임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8. 부정논리의 실천
1. 열반(涅槃)
1)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열반론
중론제25장은 열반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제4게송부터 제6게송은 열반을 유(有)로 설명하는 설일체유부의 설을 비판하고 있다. 상좌부 논서인 논사(論事)를 보면, 유부는 열반의 실체를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열반은 독립된 실체이고(논사, p.219), 멸(滅)을 본질로 하는 사물이며(뿌라상가빠다, p.525), 오온과는 다른 사물이다(논사, 219). 또한 그들은 열반이 번뇌와 업 그리고 고가 연속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막는 것으로서 물이 흘러가는 것을 막는 제방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뿌라상가빠다, p.525)
따라서 설일체유부에 의하면 열반은 다만 갈애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열반이라는 독립적인 법이 있어야 갈애의 소멸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뿌라상가빠다, p.525). 설일체유부의 교학에 의하면 열반이란 무위법 가운데 택멸법(擇滅法)에 해당하며 이것이 열반을 이룰 수 있게 한다고 설명한다.
2) 용수의 비판
유부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나가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열반은 존재가 아니다. 존재로 인정하면 노사의 상을 가지게 되는 오류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노사의 상이 없다면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25-4)
곧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존재하는 사물은 반드시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사라는 특징을 가지지 않는 열반은 존재하는 사물일 수 없다. 그러므로 만약 생멸과 노사의 특징을 가지지 않는 사물을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허공 속에 핀 꽃과 같아서 실재하지 않는 사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게송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뿌라상가빠다, p.525)
또한 만일 열반이 존재라고 한다면 열반은 유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디서나 어떠한 것도 무위인 존재는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다.(25-5)
이것은 결국 앞의 게송과 동일한 취지의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모름지기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존재하는 사물은 반드시 노사(이멸異滅)의 특징을 가지기 때문에 유위(有爲)이어야 하며, 노사(이멸)의 특징을 가지지 않는 무위(無爲)의 존재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르주나는 이와 같은 입장에 근거하여 설일체유부의 열반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가르주나의 비판이 타당한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왜냐하면 설일체유부에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존재의 틀이고, 그것을 실체시하여 유(有)로 간주한 것이지만, 나가르주나는 유를 현실적 존재로 해석하여 설일체유부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연기설의 진의를 체득하지 못하고 공을 특수한 것으로 혹은 원리로 보기 쉬운 것이 일반적인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관파는 여러 가지의 비유를 사용해서 공견에 떨어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중론에서는 공견은 “불완전하게 붙잡은 뱀” 혹은 “미완성의 주술”로 비유하고 있으나(제24장 제11시), 대지도론이나 핑가라(청목) 주석에는 약독(藥毒)의 비유로 표현되고 있다. 곧 약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마시는데 만약 병을 다스리고 나면 약이 체내에 머물지 말고 밖으로 배출되어야 할 텐데 배출되지 않는다면 또한 병을 일으키게 되는 것과 똑같이 공은 번뇌를 멸하기 위해서 설하는 것인데 그런 공에 집착한다면 도리어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마는 것이니 이를 “공견에 떨어졌다”고 설하고 있다.(대지도론3권 대정장 25, p.288)
또한 핑가라의 주석을 보면 다시 번뇌의 불은 공의 물을 가지고 끌 수 있는 것인데 만약 물에서 불이 나온다면 이것을 끄는 수단이 없는 것처럼 공견에 떨어진 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구제할 도리가 없다고 한다(대정장 30권, p.18하). 또한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주석은 대보적경(大寶積經) 속에서 공견을 논파하고 있는 유명한 한 구절을 인용하여 논하고 있다(뿌라상가빠다, p.248) 여기를 보면 당시 공을 오해했던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중관파가 극력으로 공견을 배척하기 위하여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름지기 공견이란 공이 연기를 의미하고 유와 무의 대립을 넘어서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으나, 이것을 대립의 입장으로 끌어내려서 생각하는 것이다. “공 또한 다시 공”이란 이와 같이 공견을 배척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말하는 부정, 예를 들면 스피노자의 “negatio negations(부정에 대한 부정)”, 혹은 헤겔의 “negation der negation(부정의 부정)”과는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헤겔철학은 동서 학자들에 의해서 자주 인용되고 있으나 그것과 나가르주나의 사상과는 상당히 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한의 부정을 계속해서 정반합의 과정을 지나서 궁극의 목적을 향하여 발전해 간다고 하는 헤겔의 사상은 중론속에서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중론에 있어서 “공 또한 다시 공”은 상호의존의 설에서 떠나서 고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⑥ 무와 공
위에서 유 무 공이라고 하는 세 가지 개념의 관계에 대해서 산발적으로 설하였으나, 이제 최후의 문제가 남아 있다. 무와 공은 충분히 구별해야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해서 반야경을 보면 제법의 무를 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문구가 적지 않다.
거기서 반야경은 제법의 공을 설하고 있지만 그것은 곧 무의 의미이기 때문에 공과 무를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무는 무자성의 의미라고 할 수 있고, 공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지만 “무자성”이라고 하는 말은 역시 “무”라고 하는 개념규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문도 반야경의 문구 자신에 의해서 해결되고 있다고 생각된다(예를 들면 대반야경」372권 대정장6권, p.926상).
여기에 의하면, 일체법은 무이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유와 무를 떠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보여지는 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후자의 무는 유와 대립했던 무이다. 전자의 무는 그러한 대립을 떠나 있는 무이다. 그리고 무라고 하는 개념은 반드시 유라고 하는 개념을 예상하고 그것과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후자의 무가 진실한 의미에서 무이며, 전자의 무와 대립을 떠나 있는 것에 대해서 임시로 명명한 것이다. 곧 전자는 불가설에 있는 임시로 “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요, 공과 동의어이다. “무소유”라고 하는 말도 이 의미로 이해할 수가 있다.
또한 무자성이라는 말 속에 있는 “무”라고 하는 의미도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반야경 속에서는 자주 여러 가지 사물의 무가 설해지고 있지만 이것은 대립 속에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범부의 입장을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임시로 설해진 것인데 공과는 동의어 이고 유와 대립한 무와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궁극의 공은 부정을 계기로 했던 것이다. 때문에 공을 설했다고 하는 것도 실은 하나의 방편인 것이다. 공을 절대시 한다면 그 순간에 공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⑦ 제법실상(諸法實相)
그런데 공에 연관해서 문제되는 것은 “제법실상”의 관념이다. 나가르주나와 그 계통의 사람들은 “제법실상”을 설했다고 옛날부터 말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끝으로 그 의미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구마라집도 중론을 번역하는 가운데 이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원어를 조사해 보면 구마라집은 반드시 동일한 원어를 이와 같이 번역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법화경 팔천송반야 십만송반야」 속에서 제법실상 또는 실상의 원어를 찾아보면 대략 다섯 종류로 분류할 수가 있다.
제1부류는 법성(dharmatā)이라고도 번역되는 원어의 구룹에서 “법의 본질”을 의미한다. 법성은 연기의 이법이 정해져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제2부류는 진여(tathatā)라고 번역되는 말로 그 의미는 “그러한 것”을 뜻한다. 이것도 무자성 공 등의 동의어가 있다.
제3부류는 실제(實際 bhūtakoṭi)와 동의이거나 이것에 가까운 의미이다. 그것도 “법성” “ 진여”와 같은 뜻인데 제법실상의 이명(異名)이고 공과 동의어이다. 실제란 법이 그것에 의해 성립하는 근거가 되는 동시에 중생이 이것에 깨달아 들어가고 복귀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제4부류는 법의 자성(dharmasvabhāva), 혹은 자성(prakṛti)의 구룹이다. 중관파에서는 법은 서로 의존해서 성립한다고 설해진다. 따라서 “법의 자성”은 “제법의 상의(相依)” 곧 공으로 설하는 데 이르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연기의 여실한 상 곧 상의 혹은 상호한정을 의미한다.
제5부류는 진성의 특징(tattvassya lakșaṇa)의 구룹에 속한다. 여기서 진성(tattva)의 의미가 문제가 되지만 그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그것인 것” 이다.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주에 의하면 공과 동의어이다. 또한 “제법의 자성”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이것도 연기의 여실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법실상의 원어는 많이 있지만 모두 동일한 의미, 곧 제법이 서로 의존하거나 한정하면서 성립해 있는 여실상을 의미하며, 이것은 연기와 같은 의미인 것을 알 수 있다.
중론 가운데 가장 명료하게 제법실상을 설하고 있는 곳은 제18장 관법품일 것이다.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이나 구마라집의 번역에 비추어 보면, 그곳에서 생불은 “연해서 생긴 것이 그대로 제법실상으로 간주되며” 연기에 대해서 팔불(八不)이 설해지는 것과 같이 제법실상을 불멸 불일불이 불상부단 불일불이라고 설하고 있다.
또 중론 제18장 제9 시에서는 “다른 것에 연하지 않고 적멸인 것, 희론에 의해서 희론되지 않는 것 무분별이고 다양하지 않은 것, 이것이 진리의 모습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도 중론의 귀경게에서 보이는 희론이 적멸하여 길상인 연기와 내용적으로는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법실상의 의미는 “다른 것을 연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곧 언어에 의해 표현될 길이 없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와 같이 제법실상에 대한 설명은 결국 연기에 대한 다른 설명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앞에서 검토한 내용을 화엄경에서 설명하는 실상이나 제법실상에 적용해 보면 그대로 상통함을 알 수 있다. 종래의 동북아시아 불교학에서는 연기와 제법실상이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여겨왔지만, 본래 그 양자는 동일한 취지인 것임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8. 부정논리의 실천
1. 열반(涅槃)
1)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열반론
중론제25장은 열반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제4게송부터 제6게송은 열반을 유(有)로 설명하는 설일체유부의 설을 비판하고 있다. 상좌부 논서인 논사(論事)를 보면, 유부는 열반의 실체를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열반은 독립된 실체이고(논사, p.219), 멸(滅)을 본질로 하는 사물이며(뿌라상가빠다, p.525), 오온과는 다른 사물이다(논사, 219). 또한 그들은 열반이 번뇌와 업 그리고 고가 연속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막는 것으로서 물이 흘러가는 것을 막는 제방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뿌라상가빠다, p.525)
따라서 설일체유부에 의하면 열반은 다만 갈애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열반이라는 독립적인 법이 있어야 갈애의 소멸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뿌라상가빠다, p.525). 설일체유부의 교학에 의하면 열반이란 무위법 가운데 택멸법(擇滅法)에 해당하며 이것이 열반을 이룰 수 있게 한다고 설명한다.
2) 용수의 비판
유부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나가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열반은 존재가 아니다. 존재로 인정하면 노사의 상을 가지게 되는 오류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노사의 상이 없다면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25-4)
곧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존재하는 사물은 반드시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사라는 특징을 가지지 않는 열반은 존재하는 사물일 수 없다. 그러므로 만약 생멸과 노사의 특징을 가지지 않는 사물을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허공 속에 핀 꽃과 같아서 실재하지 않는 사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게송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뿌라상가빠다, p.525)
또한 만일 열반이 존재라고 한다면 열반은 유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디서나 어떠한 것도 무위인 존재는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다.(25-5)
이것은 결국 앞의 게송과 동일한 취지의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모름지기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존재하는 사물은 반드시 노사(이멸異滅)의 특징을 가지기 때문에 유위(有爲)이어야 하며, 노사(이멸)의 특징을 가지지 않는 무위(無爲)의 존재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르주나는 이와 같은 입장에 근거하여 설일체유부의 열반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가르주나의 비판이 타당한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왜냐하면 설일체유부에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존재의 틀이고, 그것을 실체시하여 유(有)로 간주한 것이지만, 나가르주나는 유를 현실적 존재로 해석하여 설일체유부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